노동계의 해묵은 과제 중 하나인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의 ‘노동자 지위 인정’ 논의가 6년째 제자리걸음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정부가 내놓은 ‘특수고용직 보호대책’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는 노동계가 요구해 온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노동3권 보장을 장기과제로 미루면서 직종 또한 6년 전의 내용을 적용해 그동안 다양화.세분화된 직군을 보호대책에서 제외했다. 이에 따라 골프장 경기보조원.학습지 교사.레미콘 기사.보험설계원 등 현행법에서 ‘사업자’로 분류돼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직군은 근로기준법상 노동3권 보장을 기약 없이 미루게 됐다.
정부 “노동자 지위 장기과제로”, 노동계 “오히려 후퇴”
민주노총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8개 노동사회단체는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성 인정을 제외하고 추진하고 있는 정부의 특수고용직 보호대책은 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묶어놓겠다는 것"이라며 전면 철회를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특수고용노동자는 사실상 회사의 직접 지휘.명령을 받고 있는 노동자로서 노동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며 “정부가 6년간 퇴보와 개악을 거듭하다 결국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보호의지가 없음을 여실히 드러냈다”며 맹비난했다.
조준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2백만 특수고용직 노동자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사회양극화의 핵심의제”라며 “조속히 노동기본권을 인정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특수고용직보호대책은 4개 직종 33만여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할 뿐 9개 직종 1백60만 노동자들은 적용에서 제외된다.ⓒ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앞서 지난 12일 노동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 부처가 모인 ‘특수형태 근로자 종사자 대책위원회’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을 공정거래법과 하도급법, 약관법 등 경제법 적용을 통해 보호하는 ‘보호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번 정부의 보호대책의 적용대상은 2백만명(정부 추산 90만명)으로 추산되는 특수고용직 가운데 보험설계사와 학습지 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레미콘 기사 등 4개 업종 33만5천여명이다.
그러나 현재 노동계가 파악하고 있는 특수고용직 직종은 총 13개, 인원 또한 정부 추산치의 두 배를 넘는 2백만에 달한다. 정부의 보호대책은 이번에 배제된 9개 직군 1백60만여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보호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
정부 6년 논의 불구 ‘노동자성 인정’, ‘직군 범위’ 결론 못 내려
게다가 특수고용직에 대한 정부 보호대책은 최초로 논의가 진행된 2000년 당시보다 현격히 후퇴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우선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노동 3권 보장 여부는 이미 노동부가 2000년 당시 산업자원부, 재정경제부와의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부처 의견을 제시한 내용들이다.
당시 노동부는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을 노동조합법상 ‘노동자’로 인정해 노동3권을 보장하고 근로기준법상 시행령을 통해 임금보호.해고제한.산재보험 등을 적용하는 내용의 보호대책을 마련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관련법 미비를 이유로 경제부처가 반대함에 따라 무산된 이후 특수고용노동자를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관한 모든 논의를 노사정위원회로 일원화했지만 ‘특수고용종사자특별위원회’는 노동자성 인정 여부는 고사하고 직종 범위조차 구체화하지 못했다.
특수고용직의 직군 범위는 지난 6년간 다양해진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4개 직종만을 우선 보호대상으로 분류해 최근 논의가 활발한 애니매이터, 방송작가, 가전제품 수리기사, 간병노동자(호스피스), 학원차량기사, 대리운전기사, ?o서비스 기사, 애니메이터 등은 논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조돈문 카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국가들은 종래 기준을 넓혀 노동자성 범위를 확장하는 추세고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노동자법으로 보호하는 것을 타당하게 여기고 있다”며 “노동법 대신 경제법을 들고 나온 정부의 보호대책은 추세를 역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특수고용직 노동자 논의는 노동자성 인정, 노동관계법 보호라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미 많은 특수고용직 노조가 사실상의 노조 역할을 해왔다”며 “이번 정부의 대책은 이들의 노동기본권을 박탈하고 로드맵과 마찬가지로 반노동자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노동계 “보호대책은 업무태만 바로잡는 행정조처 불과”
정부가 내놓은 보호대책의 실효성 여부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특수고용직 종사자에 대한 공정거래법과 하도급법, 약관법 적용은 기존의 종사자와 업체간 ‘불공정 거래 행위' 규제를 골자로 하고 있다.
특수고용직 종사자를 일종의 ‘자영업자’로 규정하고 대기업과 하도급, 원청업체와 하청업체의 공정 거래 규칙을 적용하는 형태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노동연구원의 보고서와 18일 민주노동당이 발표한 특수고용직 노동자 실태조사결과에 따르면 특수고용직 노동자와 일반 노동자의 업무 내용은 사실상 종속적 노사관계에 가깝다.
이미 업체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에게 업무지시를 내리고 모집까지 하는 사실상의 노사 관계에서 업체간의 불공정 거래 규제는 현실과 동떨어진 대책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 김성희 한국비정규직연구센터 소장은 “근로자성이 확정되지 않은 경우에도 서구 의미의 경제적 종속적 노동자로서 사회적 보호방안을 마련해야한다”며 “해당 직종의 관련 경제법을 적용하는 정부의 대책은 보호대책이 아니라 업무태만을 바로잡는 행정조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노동계 현안 맞물려 민주노총.특수고용노동자 반발 거셀 듯
민주노총, 민변 등 8개 노동사회단체는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장기과제로 미룬 정부의 보호대책을 강하게 성토했다.ⓒ뷰스앤뉴스
이처럼 노동부가 스스로도 핵심 쟁점이라고 밝혔던 '노동자성 인정'을 장기과제로 미루고 실효성이 의심되는 특수고용직 보호대책 발표를 강행할 경우 노동계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정규직 관련 3법, 노사 로드맵, 산재보험법 개정안 등으로 폭발직전인 노사정 관계와 맞물려 투쟁 정국으로 치닫는 데 기폭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민주노총은 이미 노사로드맵 합의 전격 철회를 요구하며 10월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고 덤프연대, 화물연대, 학습지노조를 비롯한 특수고용직 노동조합 또한 하반기 총력투쟁에 가세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노사갈등에 따른 장기투쟁사업장이 속출하고 있는 골프장의 경기보조원, 운송대란이라며 언론이 대서특필했던 레미콘, 덤프 기사들 모두 현행법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자영업자’들이다.
조준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특수고용직 노동자 문제에 대해 정부는 노동계의 요구과 실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며 “정부는 노동계의 상식적인 요구를 받아들여 시행해야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