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20대 "취업한 자가 강한 자다"
<현장> "미래세대가 과연 지금세대보다 잘 살 수 있을까"
풍광 2 2월 10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자격증서적 코너. 김광현(가명, 31)씨는 벌써 두시간째 각종 자격증 서적을 뒤적이고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를 졸업한 그는 최근까지 2년간 IT계열의 작은 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회사원이었지만 인력감축을 원하는 회사의 눈치를 보다 결국 지난해말 사표를 냈다. 그는 “회사가 직접 나가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유일한 미혼에 막내였던 내가 타겟이 되는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며 “실업급여를 받으며 취업이 될만한 자격증 공부를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게 아니라, 취업한 자가 강한 자다"
지난 1월 10대~30대 일자리가 무려 35만3천개나 줄어들었다. 2~3월에는 50만명의 고교, 대학 졸업생이 쏟아져 나온다. 청년실업 200만 시대가 초읽기에 들어섰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대불황의 직격탄을 청년세대가 집중적으로 맞고 있는 것이다.
12일 오후 강서구 소재 구립도서관 야외 벤치. 늦은 점심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취업준비생 4명을 만났다. 길게는 4년, 짧게는 6개월간 취업을 준비 중이라 했다. 이들은 작금의 경제상황에는 우려를, 정치-사회 상황엔 철저한 냉소를 보냈다.
4년째 도서관 붙박이로 이들사이에서 ‘장수생’으로 불리는 김모(33)씨는 “이력서만 100장을 넘게 썼지만 면접이라도 본 곳은 딱 두 곳, 그것도 계약직이었다”며 “졸업 이후도 꾸준히 올린 스펙이 취업을 아예 못할 정도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요즘은 내가 사회부적응자라는 확신이 든다”고 자조했다. 그는 “MB가 언젠가 우리들보고 눈을 낮추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한동안 멍 때린 적이 있다”며 “도대체 눈을 얼마나 더 낮추라는 건가, 섬에 내려가 새우잡이배라도 타라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공무원 9급 시험을 준비 중인 이모(28)씨가 거들었다. “비정규직? 인턴? 다 좋다. 그런데 관련 뉴스만 보면 힘없고 박봉에도 내쫓기는 비정규직 이야기들뿐인데 무슨 희망을 갖고 거기를 가냐. 그들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가 될 게 뻔한데...”
김모(29)씨는 “정부에서 청년실업을 해소한다, 일자리를 늘리겠다 말들은 많이 하지만 정작 그걸 피부로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며 “주변에 취업한 친구들 중에는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도 자기들 또한 잠재적인 실업자라며 불안해한다”고 말했다. 그는 “면접 때문에 신문과 뉴스를 빠짐없이 챙기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죽어나는데 권력은 쌍팔년도 이념 논쟁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면 정말 화가 난다”며 “젊은 세대에게 희망은커녕 절망만 안겨주는 국가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정치권과 정부를 싸잡아 질타했다.
이들은 뭐가 가장 시급한가라는 질문에 ‘안정적 일자리’, ‘취업 지원금’, ‘토익점수 폐지’ 등을 열거하다가 “회사에서 파준 명함”이라고 씁쓸히 말하고 다시 열람실로 발길을 돌렸다.
이날 만난 취업준비생의 낡은 취업상식사전 앞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게 아니라, 취업한 자가 강한 것이다."
"요즘 아내와 하는 얘기는 집을 줄이자는 얘기"
이미 사회에 진출한 30대가 처한 상황도 절박했다.
37살의 공인중개사 김오성(가명, 37)씨. 인문계열 대학원을 중퇴하고 사회에 뛰어든 김씨는 경력 7년의 공인중개사지만 2년 전부터 보험회사에 들어가 '투잡' 생활을 시작했다. 한때 수도권 일대에 아파트투기 광풍일 불었을 때 이른바 ‘딱지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봐 결혼해 아이 둘까지 낳았지만 결혼직후 부동산거품이 꺼지면서 일년에 서너달은 수입이 제로(0)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아내의 맞벌이로 버텨왔지만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앞이 깜깜할뿐이라 했다.
그는 “투자자들을 만나면 '위기는 기회다, 지금이 투자 가치가 높은 상품들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다'라고 입에 달고 다니지만, 다들 현금을 쥐고 있는 것이 능사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그런 말들이 먹힐 리가 없지 않나”라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집에서 아내와 하는 얘기 대부분이 수입이 사라져 바닥을 친 통장잔고와 펀드 얘기고, 집을 줄이자는 얘기”라며 “솔직히 이 나이에 다른 일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건 씀씀이와 규모를 줄여 약간의 여유자금이라도 쥐는 것밖에 뭐가 있겠나”고 반문했다.
4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취직이 안돼 지금은 경기도 일산에서 3년째 영어과외 교사를 하고 있는 이모(35)씨는 과외로 모은 돈으로 자영업을 하기 위해 시장조사중이다. 하지만 그는 요즘 암담하다 했다.
그는 “다양한 업종을 두고 점포도 알아보고 시장조사도 했지만 그나마 불황일 때 잘된다는 PC방조차도 수익 내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외환위기때처럼 실업자들이 자영업쪽으로 몰려온다는데 그렇게 되면 경쟁도 치열해지고 그만큼 실패 확률도 높을 것 같아 걱정”이라며 “주변에서 다들 '지금은 숨죽일 때다, 안 그러면 살아남지 못한다'고들 말하며 말린다”며 사실상 자영업 포기 의사를 밝혔다.
"미래세대가 과연 지금 우리보다 잘 살 수 있을까"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을 잡을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고민했지, 지금처럼 일자리 자체가 없어 고민하지는 않았다. 어디든 취직은 됐다. 그런 면에서 지금 세대들은 불행한 세대다."
금융당국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기성세대는 그동안 나쁘게 말하면 미래세대를 등쳐먹었다. 수년간 아파트값을 폭등시키며 불로소득을 취했다. 앞으로 집을 장만해야 할 미래세대를 수탈한 것이다. 지금은 경기부양을 한다고 엄청난 재정적자를 만들고 있다. 이 또한 미래세대가 대신 벌어 갚아야 할 돈이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미래세대의 부양 부담도 급증할 것이다. 미래세대가 과연 지금 우리보다 잘 살 수 있을까.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ERISS)'는 지난 5일, 충격적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기회가 되면 이민을 가겠냐는 질문에 고교생 61.4%, 대학생 50.6%가 가겠다고 답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나가 싸우겠냐는 물음에도 고교생의 55.8%, 대학생의 58.4%는 "No"라고 답했다. 고교생 53.7%, 대학생 45.4%는 다음 세대가 지금 세대보다 더 잘 살고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미래세대에게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 한국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 한국이 진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최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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