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이 30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기까지 정 전총장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이명박 대항마' 정운찬
정 전총장이 정치권에서 본격적으로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특히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박근혜 전대표를 제치고 독주를 거듭하기 시작한 지난해 10월부터의 일이다.
'이명박 독주'에 당황한 범여권 등 비한나라당 정치권은 이 전시장에 필적할만한 대항마를 찾기 시작했고, '0순위'로 떠오른 인물이 한국의 대표적 경제석학인 정 전총장이었다. 정 전총장은 경제전문가라는 측면과 동시에, 충청권 출신이라는 게 매력 포인트로 지목됐다. 지난 1997년 정권창출 공학인 '충청+호남', 즉 '서부벨트'의 리바이벌이 가능해보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정치권의 러브콜이 잇따랐다. 정 전총장도 이때부터 대선출마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주위 지인들로부터의 대선출마 권유는 정 전총장이 서울대 총장 재직시절부터 있어왔다. 범여권에 마땅한 대선후보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총장 재직 시절 '교육 3불정책'을 놓고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온 대목도 정 전총장의 경쟁력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안티 노무현'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데다가 보수층의 표를 잠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주위의 잇따른 러브콜에 정 전총장 마음은 대선 출마 쪽으로 기우는듯 했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가 '뜻'을 굳힌다면 돕겠다는 지인들도 하나둘 나타났다.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이 고심끝에 30일 끝내 대선출마의 꿈을 접었다. ⓒ연합뉴스
좌절과 패착의 연속
그러나 이때부터 정 전총장의 실수와 고민이 시작됐다. 지난해말인 12월26일 그는 충남 공주 향우회 송년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번째 패착이었다. "충청사람은 느리지만 한번 결심하면..."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도 했다. '지역주의에 기대어 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차가운 비난과 의혹의 눈길이 쏠렸다. 현실 정치공학상 지역적 지지는 필수불가결한 측면이 있다. 한나라당의 손학규 전지사가 개혁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한자리 숫자 지지율을 돌파하지 못한 것도 지역적 기반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정 전총장이 '충청'을 찾은 것은 패착중 패착이었다. 국민에게 '새로움'보다는 '구태'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차가운 여론에 정 전총장은 당황해 했다.
기대밖으로 턱없이 '낮은 인지도'도 정 전총장을 당혹케 만든 복병이었다. 정 전총장은 자신의 인지도가 이렇게까지 낮을 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의 인지도는 밑바닥으로 나타났다. 충청의 한 언론계 지인은 고향에서의 그의 인지도를 조사해봤다. '정운찬'이란 이름을 아는 충청인은 10%를 약간 웃돌 정도였고, 질문을 바꿔 '서울대총장 정운찬'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비로소 절반 약간을 넘을 정도였다. '서울대총장 정운찬'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으나 '정운찬'은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인지도'가 낮으니 '지지율'이 오를 리 만무였다. 정 전총장은 큰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서울대총장 정운찬'이란 지명도에 대한 과신이 초래한 좌절감이었다.
그러나 그의 낮은 지지율을 인지도 탓으로만 돌릴 일도 아니었다. 좀처럼 오르지 않은 그의 낮은 지지율은 상당 부분 자신의 잘못이었다. 범여권에서 '정운찬 대안론'이 부상하자 언론은 정 전총장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했다. 인지도와 지지율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러나 정 전총장은 계속 "고민중"이란 말만 했다. 그러면서도 전국을 누비는 '강연정치'를 했다. 일반국민에게 이런 모습은 '소심'하면서도 '이중적'인 모습으로 비쳤다. 언론의 관심 집중으로 '인지도'는 높아졌으나 '지지율'은 오르지 않았다. '네거티브 인지도'만 높아진 결과다.
그의 '고민'이 계속되자 언론의 관심도 시들해져갔다. 그가 지방에서 강연을 해도 기사 한줄이 올라오지 않았다. 매일 고민중이니 그럴 수밖에. 정 전총장은 더욱 깊은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높고높은 현실정치의 벽
그의 '장기 고민'에는 속성상 '감탄고토', 즉 달면 삼키고 쓰면 뱉기 마련인 현실 정치권도 큰 작용을 했다. 정 전총장은 현실정치권에 부정적이다. 솔직히 그는 열린우리당도 싫고, 한나라당도 싫었다. 열린당은 '노무현당'이란 이유에서, 한나라당은 '부패정당'이란 이유에서였다. 그는 '반노무현-반한나라' 노선이 분명했다.
이처럼 정치권 양대세력을 빼고 나니 남는 건 민주당, 국민중심당, 그리고 탈당세력뿐이었다. 정치조언세력 일각에서는 우선 이들부터 엮어 정치세력화를 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4.25 재보선 전에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 학교를 나와 이들과 함께 재보선 국면에 뛰어들어 심대평 국중당후보 지원유세 등을 통해 충청권에 단단한 지지기반을 구축할 것을 주문했다.
정 전총장은 그러나 이 조언을 거부했다. 지역주의 세력으로 비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나보면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정치권의 주판알 튕기기도 싫었다. 특히 동교동계의 이중 플레이가 싫었다. 얼마전 광주에 강연을 갔을 때 그는 이른바 호남유지들과 만났다. 이들은 "당신은 뭐 한 게 있다고 대통령이 되려 하느냐"고 힐난성 질문을 던졌다. 호남정치권의 텃세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동교동 일각에서 "정운찬을 밀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대선주자가 되고 싶으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라는 동교동의 메시지로 정 전총장은 받아들였다.
그는 오픈프라이머리도 싫었다. 그의 경제학적 표현을 빌면 이는 "2002년 대선때 한번 쓰여 한계효용을 다한 방식"에 불과했다. 그는 상당수 정치권 대선주자들이 그를 불쏘시개나 흥행몰이 수단으로 쓰려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추대하는 대가로 대선후 '당권'이나 '조각권'을 요구하는 게 싫었다.
대신 그는 신당 창당을 깊게 고민했다. 자신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구축한 뒤 기성정치권을 빨아들였으면 했다. 그러나 이 또한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구상이었다. 우선 '돈'이 문제였다. 2002년 대선에서의 '차떼기' 후폭풍에 따른 정치자금법 개정으로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조성할 수 있는 길은 현역의원들 하고 정치를 할 때만 가능하다. 개인이 비정치권 인사들과 모여 신당을 만드는 것은 현재의 정치자금법상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던 와중에 스승인 조순 전 한은총재의 조언으로 정대철 열린당 고문을 만나는 또하나의 패착을 뒀다. 정 고문은 DJ정권-노무현정권 창출과정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인물. 비록 30분간에 불과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와의 만남은 네거티브 이미지를 덧씌우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
'불면의 밤'
정 전총장은 얼마 전부터 '불면의 밤'을 보냈다 한다.
정치 자문격인 김종인 민주당 의원은 열흘 전쯤 기자에게 "만나보니 정 전총장이 퇴로를 생각하는 것 같더라"는 인상을 전했다. 그는 정 전총장에게 "대선 출마를 하든 말든 잠은 푹 잘 자둬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그러면서 "더이상 정 전총장의 정체성에 혼란이 생겨선 안될 것 같다"고도 말했다. 누구보다 정 전총장을 아끼고, 오래 전부터 그의 대선출마를 주문해온 김 의원의 진단이었고, 김의원 예상대로 정 전총장은 30일 불출마선언을 했다.
정 전총장은 오랜 기간 자신이 대선후보가 돼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자문해왔다. 그는 "한국경제는 몇년래로 존립 자체를 뒤흔들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특히 양극화 문제가 치명적이며 과잉유동성이 만들어낸 아파트거품, 주식거품 등 자산거품 파열도 한국경제에 큰 타격을 줄 것"으로 걱정해왔다. 그는 이같은 '공황적 위기' 타개에 자신의 역량을 쏟아붓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접었다. 그는 자신의 '불출마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측근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밤새도록 홀로 작성한 불출마의 변이다.
"정치는 비전과 정책 제시만이 아니라 이를 세력화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태껏 그런 세력화 활동을 이끌어 본 적이 없는 저는 국민들 앞에 정치 지도자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가 그동안 소중하게 여겨 온 원칙들을 지키면서 동시에 정치세력화를 추진해 낼만한 능력도 부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