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투자증권의 안수웅 애널리스트는 최근 한 간담회에서 행한 주제발표에서 한국자동차업계에 던진 화두다.
이 화두의 의미는 크다. 단지 외국의 소비자뿐 아니라, 최근 '렉서스 돌풍'에 빨려들어가고 있는 한국 상류층에 대해서도 한국자동차업계가 주어야 할 해답이기도 하다. 국내의 외국차 시장점유율이 5%를 넘어선 현시점에서 언제까지나 '애국심'에 호소한 마케팅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타결 초읽기에 들어간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수입차 관세 등이 대폭 낮아질 경우 국내고급차시장에서 이중삼중의 타격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원고-엔저로 '성장의 선순환고리' 끊어져"
그는 "현대차그룹의 경우 2000년 이후 원화약세, 내수확대 등 우호적 경영환경 아래 빠르게 성장했으나 2005년 이후 원화강세 반전, 내수침체 지속, 엔화약세에 따른 일본업체 경쟁력 강화 등 대내외 경영환경 악화로 성장의 선순환고리가 끊어졌다"고 지적했다. 환율에 기댄 성장이 더이상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실제로 도요다-닛산-혼다 등 일본의 '빅3'와 현대차-기아차 등 한국의 '빅2' 사이의 격차는 지난해부터 좁혀지기는커녕 도리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도요다는 올해 세계최대 자동차소비시장인 미국시장의 점유율 1위가 확실시되고 있다. 미국의 자존심 GM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부인하나 GM은 이미 지는 해다. 미국의 빅3는 일본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13만명의 감원과 공장폐쇄 등을 단행했으나 일본 빅3와의 격차는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
반면에 지난 몇년간 일본 못지않은 기세로 욱일승천하던 우리나라 자동차는 지난해부터 멈칫하며 무겁게 뛰는 일본차를 멍하니 바라보는 신세가 됐다. 엔저(低) 쇼크로 그동안 일본차를 추적하던 무기인 가격경쟁력을 급속히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통신 <NNA>의 지난해 12월18일 보도에 따르면, 원고(高)로 현대자동차가 미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자동차의 시판가격을 잇따라 인상한 결과 현대차의 미국내 경쟁력은 저하돼, 도요다 자동차 '캄리'를 100으로 했을 때 같은 중형차인 '소나타'는 2006년형 87.3에서 2007년형은 91.2로 급상승했다. 또한 2005년형 도요다 'RAN4'에 대한 2006년형 '시슨'의 가격은 85.1이었던 것이 2007형 모델은 90.8로 높아진다.
지난해 미국에서 시판되는 자동차가격 상승률은 현대차가 단연 1위. 지난해말 대비 올 10월까지 현대차 상승률은 9.2%를 기록한 반면, 포드는 0.7%, 도요다는 0.5% 상승에 그치고 일본의 닛산차는 도리어 4.1% 가격을 인하했다. 중고차 값이 일본차가 월등히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차와의 가격경쟁력 상실 일보직전의 위기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매기는 신용등급만 봐도 일본 '빅3'는 모두 A등급. 반면에 우리나라 '빅2'는 B등급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한미FTA 시련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위기는 한미FTA 체결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강한 의지로 볼 때 한미FTA 체결은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다.
자동차업계는 공식적으론 한미FTA 찬성이다. 그러나 속내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한 관계자는 "한미FTA가 체결되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버는 상황이 될 판"이라고 말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미국자동차업계는 한미FTA 타결을 통해 한국시장으로의 수출증대를 노리고 있다. 그러나 국내수입차시장을 보면 미국차는 맥을 못추고 있다. 대신 '렉서스 돌풍'이 상징하듯 일본차가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독일 등 유럽차가 어부지리를 취하고 있다. 한미FTA 타결로 수입차 관세가 낮아진다 해도 반사이익은 미국차가 아닌 일본-유럽차가 가져갈 공산이 크다.
이미 한국시장은 렉서스같은 일본 완성차뿐 아니라, 삼성르노라는 간접적 일본차가 상당시장을 장악한 상태다. 이런 마당에 엔저와 관세인하라는 양대 특혜를 앞세워 일본차가 한국시장 공략에 본격나설 경우, 그동안 국내자동차업계가 독식하다시피 해온 고급차 시장은 중차대한 시련에 직면할 것이라는 게 국내 자동차업계의 말못할 고민인 것이다.
현재 렉서스 등 일본메이커들은 강남북에 속속 매장을 개설하며, 고급차 시장은 물론 중형차 시장까지 진입할 총공세 준비에 여념없는 상황이다.
한국자동차산업의 메커인 현대차가 안팎의 중차대한 시련에 직면했다. ⓒ연합뉴스
중국 "5년내 한국자동차 따라잡겠다"
설상가상, 여기에 최근 들어 중국의 도전도 심상치 않다.
중국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간 쌍용자동차가 지난주 "내년에 중국 본사가 제작한 쏘나타급 중형세단을 들여와 평택공장에서 양산, 국내에서 시판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중국이 내년에 국내에 내놓을 차량은 영국 로버자동차와 상하이차가 공동개발한 중형세단 '로위 750'으로 2500cc, 2000cc, 1800cc급을 생산할 계획이다. 가격은 국내동급차량보다 낮은 1천8백만원~2천2백만원으로 책정될 예정이다.
이같은 중국 승용차가 당장 국내시장에서 잘 팔릴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가격이 좀 낫다 할지라도 아직 기술력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몇년후 상황은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지난 1월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중국간 자동차 기술격차는 5.3년.
중국은 그동안 한국자동차계로부터 기술과 노하우를 빼내기 위해 집요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 상하이차가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쌍용차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중국이 투자할 생각은 없고 기술을 빼내가는 데만 열중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한 관계자는 "가져갈 기술은 이미 다 가져갔다"고까지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서 생산되는 쌍용차를 중국에서 팔 생각은 않고, 중국 중형차를 한국에서 팔겠다고 밝히자 쌍용차 직원들은 두손 다 들었다는 분위기다. 어이없게 중국생산차 조립공장으로 전락할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의 위협'은 단지 위협으로 그칠 수도 있다. 우리차가 일본차 시장을 뚫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우리 자동차계가 중국의 추적보다 빠른 속도로 자동차 제품경쟁력을 높여간다면 중국의 위협은 역으로 훌륭한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성과에 안주하다간 한국은 물론 세계 자동차메이커의 기술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중국의 위협은 우리의 생명선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청어 통에 메기를 넣은 이유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인간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규정한 뒤, '청어와 메기'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북해의 어부들은 잡은 청어를 런던까지 운반하면서 청어 통에 메기를 집어넣는다. 처어는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수조에서 죽을 힘을 다해 도망 다니기 때문에 어부는 싱싱한 청어를 팔 수 있다."
토인비의 이야기는 현재 한국 자동차업계가 나갈 길을 제시해준다. 한국자동차계는 지난 10년의 '원저 호황'에 안주해온 측면이 강하다. 노사갈등도 안주의 산물 중 하나다. 그러나 현대차도 글로벌 생산라인 재배치, 오랜 숙원인 일관제철소 건설, 경쟁력있는 소형차 신규투입, 플랫폼 통합 등을 통한 연구개발비(R&D) 절감 등 많은 노력을 해왔다. 내년부터는 그 성과가 나타나 가격경쟁력 및 품질 경쟁력 제고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노력만 했다고 만족해선 안된다. 절체절명의 위기감에 기초한 필사적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우리 자동차업계는 '메기'가 아닌 '청어' 신세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노사갈등 등 일련의 사태로 국내자동차업계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크게 흔들린 상황이다. 더이상 애국심에만 의존한 마케팅은 불가능해졌다는 얘기다. 이는 반대로 생각하면 다행이다. 한국 전자업계가 국내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거친 뒤 살아남은 제품만 수출해 큰 성과를 거둔 것과 마찬가지 원리로, 이제 자동차업계도 국내 소비자들의 혹독한 평가를 거쳐 인정받는 제품만 수출하겠다는 자세 변화가 요구된다. 글로벌 시대에 국내소비자, 해외소비자는 더이상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