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독립기관이다. 그러나 완전독립이란 없다. 미연준(FRB)도 그러하듯 정치 풍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명박 시대'를 앞두고 한은은 말못할 두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 하나는 '금리'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국부펀드'다.
금리, 이명박 당선인의 '6% 성장'과의 딜레마
한은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4.7%로 전망했다. 당초 전망치 5%보다 낮춘 수치다. 국제여건이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이명박 당선인은 집권 첫해 6% 전후 성장을 희망하고 있다. 간극이 상당하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려면 금리를 낮춰야 한다. 정치권력의 금리인하 압력이 거세다. 이는 우리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연준도 지난해 하반기 의회와 정부 압력으로 인플레 위협에도 금리를 세차례나 낮춰야 했고 더 낮출 분위기다.
이 당선인은 다행히 재정부담을 줄 인위적 경기부양을 하진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두고볼 일이다. 이명박 새정부의 경제팀이 짜여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경제팀 실무자들은 6% 성장 목표를 낮추려 동분서주할 것이다. 벌써부터 YS정권 초기 대표적 경제실패작인 '100일 작전'을 펴야 한다는 주장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당선인은 대선 막판 올해 주가가 3,000까지 오를 것이란 얘기도 했다. 성장률을 높이고 주가를 끌어올리려면 금리는 낮춰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물가'다. 지난해말부터 물가가 심상치 않다. 국제유가와 원자재값이 연일 폭등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국제유가 등이 오르면 3~6개월후 국내물가에 본격적 인상 압력이 가해진다. 설상가상으로 새해 벽두에 '유가 100달러 시대'마저 개막됐다. 생필품값과 대중요금 등이 줄줄이 급등하고 있다. 이성태 한은총재가 연초 금융기관 신년하례식에서 '물가'에 방점을 찍은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 금리를 낮춰도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다. 연일 시중금리가 급등,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8%를 넘어섰다. 은행들이 무리하게 대출을 많이 한 데다 돈이 증시로 빠져나간 데 따른 자승자박이다. 한은이 정책금리를 낮춘다 해도, 시중은행의 고금리는 돈의 흐름이 바뀌기 전에 해소되기 힘들다.
이런 판에 금리를 내리면 말 그대로 '자살골'이다. 반짝 경기부양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그후 금유시장 교란, 물가 상승 가속화 등 몇배나 고통스런 부메랑이 날아오게 마련이다. 한은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연초부터 '물가'에 방점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국부펀드, 외환보유고 2천6백억달러와의 충돌
한은의 또다른 고민은 '국부펀드' 압박이다.
12월말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2천622억2천만달러다. 이중 예치금 등을 뺀 2천317억8천만달러(88.4%)가 유가증권에 투자돼 있다. 어디에 투자하고 있는가는 극비이나, 대부분 미재무채권(TB)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는 세계 4위다. 경제관료들은 이 돈을 갖다 운용하고 싶어 안달이다. 노무현 정부때도 이들은 외환보유고를 미국채권에만 투자하지 말고 다른 곳에도 투자하자며 한국투자공사(KIC)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 한은의 강력 반대에도 이를 관철시켰다.
한은은 이 과정에 부채성격이 짙은 외환보유고의 경우 운영에서 무엇보다 안정성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다른 나라 중앙은행에 비해서도 한은의 외환보유고 운용수익률이 높다고도 했다. 한은의 저항으로 KIC는 2005년 200억달러로 출범하면서, 다시는 한은에 손을 벌리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이명박 당선인 측에 강만수 전 재경부차관 등 재경인맥이 핵심실세로 대거 합류했다. 반면에 한은은 인수위에 사람조차 파견 못했다. 또한 두바이를 필두로 중동국가들이 넘치는 달러를 '국부펀드'로 만들어 세계적 관심을 모으고 있고, '두바이 매니아'인 이 당선인도 이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이 당선인의 공약집을 보면, KIC의 자금조달 방식을 연기금 등으로 확대하고 투자채널도 다양화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한은 외환보유고 운용문제가 또다시 도마위에 오르는 건 시간문제다.
'국부펀드' 문제는 냉철하게 볼 필요가 있다. 중동국가들은 국가생존 차원에서 '국부펀드'에 접근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석유가 동이 날 30~60년후 어떻게 살아남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석유가 끊긴 후에도 살아남기 위해선 국제적 우량기업의 주식을 매입, 배당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위기감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들 국가의 국부펀드는 앞으로도 수십년간 무역흑자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올부터 경상수지 적자가 우려되는 우리나라와는 다르다.
또하나 간과해선 안되는 현실은 우리 마음대로 외환보유고 운용이 힘들다는 점이다. 외환보유고를 미재무채권 등 달러화 자산에만 투자하라는 미국의 압력이 엄존하는 게 객관적 국제역학이다.
이명박 당선인은 경제활성화의 걸림돌은 모두 없앴다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시장을 중시하고 신뢰한다. 그러나 한가지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시장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시장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몇 안되는 수단 중 하나가 한은의 독립성이다. 한은을 또다시 '재경부 남대문 출장소'로 되돌려선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