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에 의해 이중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이수근 씨의 간첩 행위를 도운 혐의로 21년을 복역한 처조카에 대해 법원이 40년만에 무죄가 선고했다.
서울고법 "이수근, 위장간첩 아니었다"
서울고법 형사6부(박형남 부장판사)는 19일 이수근씨의 처조카 배경옥 씨에 대한 재심에서 이씨의 암호문을 북한으로 우송되게 하는 등 국가기밀 누설을 방조했다는 혐의 등에 적용된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단지 이씨의 변장 사진을 다른 사람 명의의 여권에 붙여 위조하고 이를 사용한 혐의(공문서 위조 등)에 대해서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또 이씨의 도망을 방조하고 돈을 받은 혐의로 징역 5년이 선고됐던 이씨의 외조카 김모 씨에 대해서는 공소사실 전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씨의 사형 집행 목격자에 따르면 그가 `나는 북도 남도 싫어 중립국에서 살려고 했고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취지로 말한 점 등을 종합할 때 그를 위장 간첩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이수근이 위장간첩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이어 "그가 간첩이라는 점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배씨가 간첩행위를 방조했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암호문을 북으로 전달되게 했다는 진술이 있지만 장기간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과 폭행을 이기지 못해 강요된 자백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이 밖에 북한의 지령을 받으려고 한국을 탈출했고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등의 공소사실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다며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아울러 "당시 중앙정보부는 영장 없이 불법 구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하는 등 인권을 유린했고 이를 감시해야 할 검찰은 배씨 등이 진술을 번복할 때마다 중정 수사관에게 자리를 내주는 등 묵인했으며 법원 역시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을 구현하지 못해 인권의 마지막 지킴이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자성하며, 이수근 사건이 중정-검찰-법원의 합작품임을 지적했다.
1969년 5월 재판에서 이수근씨(맨오른쪽) 굳은 표정으로 법원의 사형판결을 듣고 있다. 그로부터 40년후 법원은 그가 위장간첩이 아니라고 판결을 뒤집었다. ⓒ연합뉴스 과거사정리위 "중정, 궁지에 몰리자 이수근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자 김일성 북한주석의 수행기자 출신인 이수근씨는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귀순, 대대적 환영과 거액의 정착금을 받고 대학교수와 결혼했고 중앙정보부 판단관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9년 1월 위조여권을 처조카 배경옥씨와 함께 이용해 캄보디아로 향하다 기내에서 중정 요원에 체포됐다.
당시 중정은 "이씨는 위장귀순한 이중간첩"이라고 발표했고, 이에 전국적으로 대대적 반공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씨는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죄 등으로 검거 6개월만인 같은 해 7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후 21년간 옥고를 치루고 나온 배경옥씨가 이수근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고 밝히며 논란이 일었으나, 민주화운동보상위는 2005년 5월 이수근 사건과 관련해 위원회법의 적용대상 시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하(불인정)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과거사정리위는 그러나 2006년 12월 전체위원회 회의를 열어 "조사결과 이수근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며 "당시 남북한 체제경쟁으로 개인의 생명권이 박탈된 대표적인 비인도적, 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 규정했다.
과거사정리위는 "중정이 북한 거물급인사였던 이씨의 귀순을 체제우위의 상징으로 선전했으나, 이후 이씨가 해외로 탈출해 궁지에 몰리자 이씨를 위장간첩으로 조작해 처형한 사건"이라며 국가에 대해 사과 및 배상을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