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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놀음, 이제는 제발 접어야

달마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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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10년 한국을 합방했다. 그로부터 32년 후인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공격 함으로서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32년동안에는 위안부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32년간에는 왜 위안부문제가 없었는가?

중국, 인도,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유럽강국들과 일본의 식민지가 됐었다. 선의였느냐, 악의였느냐에 대해 따지는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결과만을 가지고 본다면 한국은 다른 여타의 식민지들보다는 사정이 좋은 편이다.



일본은 조선 여인들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가졌던 나라들은 흑인을 노예로 잡아다가 아들 딸 부모를 떼어서 팔았고, 소나 말처럼 채찍으로 때려가면서 부렸다. 인도와 중국은 아편쟁이들이 되었다. 이처럼 여타의 식민지들은 착취와 약탈의 대상이었지만, 한국만은 일본인이 건너와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던 땅이라 애착을 가지고 가꾸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한국에는 지진도 없고, 산수가 수려하고, 대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한국을 일본만큼 가꾸고 한국인들 역시 일본인들과 동등한 대우(내선일체)를 하는 것을 정책으로 삼았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을 사범학교에 보냈고, 졸업을 하면 한국에 있는 학교에 배치했다. 한국에 일본인 전용학교들, 한국인 전용학교들을 세웠으며 도로, 철로, 항만, 발전, 공장, 건물 등 많은 자본을 투자했다. 패러다임 측면에서 보면 다른 여타의 식민지들은 착취의 대상이었지만 한국만큼은 가꿈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그 시대를 아는 분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이는 당시의 경제를 연구한 젊은 학자들에게도 형성돼 있는 견해인 듯 하다.

여성에 대한 대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우리는 5,00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 역사는 침략 받고 고통 받은 역사들로 채워져 있다. 900여회의 침략을 당했고, 대부분의 침략을 중국으로부터 당했다. 중국이 우리를 침략하면 예외 없이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여성들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 나이가 들면 퇴물이라며 버렸다. 버림 받은 한 많은 여인들이 그래도 내 땅이라고 조선을 찾으면 조선인들은 이들을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원래는 ‘환향녀’라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처럼 한국여성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한다.


위안부의 종류


“위안부”, “정신대” 이런 말들이 나올 때마다 한국인들은 흥분부터 한다. 지난 번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위안부는 양 색시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가 혼이 났고, 지금도 많이 시달리는 모양이다. 그의 글 역시 거두절미한 언론의 희생물이었다. 여배우 이승연이 위안부 역할을 하느라 누드 사진을 찍었다해서 벼락 맞듯이 당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라면 아예 손사래를 치며 멀리 하려 한다. 위안부 문제 역시 예전의 5.18처럼 금단의 구역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금단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곳일수록 문제가 많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위안부에는 엄격히 3가지로 구분돼 있지만 필자를 포함해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를 구별하지 못해 왔다.

(1) “일본군위안부”: 일본인들의 비위를 건드리거나 일본에 반항하던 집안의 규수들, 시집을 미처 가지 않은 규수들이다. 밥을 짓다가, 김을 매다가, 빨래를 하다가 또는 학급에서 공부를 하다가 잡혀간 규수들이다. 이 여인들이야 말로 가장 억울하게 잡혀가 일본군인들에게 윤간을 당한 여인들이며, 그래서 일본을 증오하는 마음이 뼈에 사무쳐 있다. 일본의 통계나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위안부”는 20%, “종군위안부”는 80%를 차지한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부대 주변에는 돈을 벌기 위해 나선 일본 창녀들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로 끌려온 한국 여성들은 돈도 받지 못하면서 성을 제공했다.

(2) “종군위안부”: 이들은 살림이 극히 어려워 스스로 군표를 받고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 창녀라 한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했던 말은 바로 이런 측면을 말한 듯 하다.

(3) “정신대”(挺身隊): 이는 ‘여자근로정신대’의 준말로, 15-40대에 이르는 근로여성으로 돈을 받고 간호사, 군수공장 등에서 일한 여성들이다. 끝까지 정조를 지킨 사람, 때에 따라 몸을 팔기도 한 사람, 또는 ‘종군위안부’로 변신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이 세 부류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일본군위안부”들이다.



일본군위안부는 지금 몇 살인가?


1944년이 아마도 마지막 “일본군위안부”가 끌려갔던 때일 것이다. 당시에 15세 이상의 여성이었다면 지금은 최소한78세 이상이 되어야 한다. 일본군인들에게 5-6년간 몸을 바치게 했다면 78세 이상의 고령에다 몸도 건강하지 못하다는 게 진짜 할머니의 증언이다. 진짜 위안부 할머니들은 정신적 고통과 성병 및 기타 질병으로 건강이 너무 상해 거동이 불편하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TV에서 보여 지는 위안부 할머니들 중에는 연세가 그렇게까지는 많아 보이지도 않고, 건강도 매우 좋아 보이며, 목소리에도 활기가 차 있는 분들이 있다.



한승조 교수가 쓴 위안부(정론지)


“태평양전쟁 중에 한국인 여성이 挺身隊(정신대)로 끌려가서 일본군의 성적인 위안물로 이용되었다 하여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계속 요구하는 모습은 일본을 나락에 밀어 떨어뜨리려다가 자신들이 먼저 떨어지는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 . . 일본이 한국여성을 전쟁 중에 그렇게 이용했다는 것도 전쟁 중의 일시적이면서도 예외인 현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그런 정책의 희생자가 수천, 수만 명이 된다면 六何原則에 따르는 명백한 증거를 찾아내어서 정식으로 거론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리 많았던 수도 아니었는데 그런 봉변을 당했다고 진술하는 몇 명 안 되는 소수의 노파를 끌고 다니면서 과장된 사실을 믿게 해줄 만한 명백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거듭 배상금을 요구하며, 그나마 이미 받은 것 이외에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면서 몇 십 년 동안 물고 늘어져 왔다는 것은 고상한 민족의 행동거지로 볼 수가 없는 것이 아닌지. 그런데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어쩌자고 이런 노파들의 행동이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기사를 만들고 열심이 보도해 대는 것인지. 애초에 性의 문제는 돈으로 환산될 수가 없는 것인데 왜 돈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자기 망신을 계속하는 것인지? 이런 치사하고 못난 짓은 하면서 어떻게 위대한 민족임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6하 원칙에 의해 인정받은 “일본군위안부”는 누구누구인가?

2004.11.29. 일본 대법원에서 6하 윈칙에 따라 확실한 “일본군위안부”였다고 인정받은 할머니가 있다. 현재 82세다. 이 할머니가 인정하는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는 33명이며, 이들 중에는 일본대사관에 나가 시위를 하는 할머니가 단 한명도 없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위안부였다고 말하는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그 진위 여부를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요사이 TV에 자주 나오는 할머니의 경우에는 일본 유관단체가 “가짜”라며 보상금 지불 마저 거절한 바 있다 한다. 일본 기자 4명에게 인터뷰를 했는데 네 번 다 말이 틀리다는 것이었다.

베트남 전은 196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병사들은 지금 60세 전후가 됐다. 고엽제 등 보상 받을 일이 생기면 “내가 월남전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기록이 없다. 증명하는 방법은 월남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사진이 없으면 당시의 지휘관들과 동료들을 찾아 증언을 하는 것이다.

1980년 광주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누가 민주화투사였느냐, 누가 시위에서 피해를 입었느냐를 조사하는 데에도 별 희한한 속임수들이 많았다. 서로가 서로를 증언해주는 일들도 허다했다. 당시에는 주유소에 가면 휘발유 통을 마구 주었다 한다. 용달차 운전자가 휘발유를 드럼 채 얻어가는 재미에 3차례나 드럼통을 가득 실어 집으로 날랐다. 4번째 가다가 총을 맞았는데 민주화투사로 보상을 받는다 한다. 이는 광주 교도소에서 들은 말이다. 이런 유의 잡다한 사례들은 광주인들 스스로도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런데! 60여년이 지난 지금 가짜 위안부로부터 “진짜 일본군위안부”를 가려내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대개는 "노인이 돼서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당한 건 사실이다"라며 우기는 경우가 많다 한다.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 낮 12:00-13:00까지 일본 대사관 앞에서는 3명에서 많게는 6명 정도의 할머니들이 가슴 앞에 노란 색 천을 두르고 시위를 한다. “진상을 규명하라” “사죄하라” “배상하라” “역사교과서에 진실을 실어라” “전범자를 처벌하라”. 벌써 600여회를 훨씬 넘겼다 한다.

진짜 “일본군위안부”나 “종군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은 창피해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후미진 곳에 산다고 한다. 일본 법정에서 진짜 “일본군위안부”로 증명된 할머니의 말씀으로는 진짜 할머니들은 TV에 얼굴 찍히기를 싫어하여 단 한번도 노출된 적이 없다고 한다. 최근 TV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할머니들 중에는 중국에서 온 5명 정도의 할머니들도 있다한다. 이들은 일본 대사관 앞에 나오는 대가로 하루에 몇 만원씩의 일당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에서 온 할머니들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 수용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진짜로 알려진 33명의 할머니들은 나눔의집이 싫다며 나와서 산다고 한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에 구애됨 없이 보상을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위 3개 카테고리 중에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는지 분명히 구분하여 보상을 청구하면 받아주겠다고 한다. 모두가 “일본군위안부”라는 가장 유리한 카테고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한다. 현재 “일본군위안부”라고 서로 믿는 할머니 수는 33인이며, 이들은 “세계평화 무궁화회 33인회”를 구성하고 있다.


다음 목차

1. 위안부를 소재로 한 사회운동

2. 위안부를 위한다는 사람들의 본질

3. 위안부 문제의 복마전
(진짜 일본군위안부할머니는 위안부 단체에서 돈 받은 적이 딱 한번 있다고 한다. 400만원!)

4. 진짜 “일본군위안부”가 신청한 가처분신청
(수요시위 동원금지 가처분신청, 위안부 모금행위금지 가처분신청)

5.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위안부 놀음, 이제는 접어라!

1990년,11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위안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취지로 창설됐다. 창설 당시 정대협 운영을 주도한 사람들은 소위 ‘이대’ 졸업생들이었다 한다. 윤종옥(83세 가량)은 이휘호씨(김대중의 처)의 선배이자 기독교인으로 알려졌고, 지은희는 전여성장관, 그리고 이미경은 열우당 의원이다. 그리고 신혜숙 등이 있다 한다.

1991년, 정부는 전국 읍면동에 공문을 보내 “위안부에 대해서는 비밀을 보장해 줄테니 창피해 하지 말고, 신고하라”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고, 이에 따라 신고자는 총 2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125명 정도이며, 이 125명 중 진짜 “일본군위안부”라고 자기들끼리 확인한 노인들은 33명이다. 이 모임은 약칭 “무궁화회 할머니회”로 불린다. 이 할머니 대표가 바로 일본 대법원에서 진짜로 확인된 '심미자'(82세) 할머니이며, 2005.4.13. 오전과 오후에 걸쳐, 필자가 여러 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현재 매주 수요일 시위에 나오는 할머니들 중 언론에 얼굴이 가장 많이 비친 할머니는 두 분 정도인데, 공교롭게도 이 두 분에 대해서는 일본 사회(국회의원, 기자)에서 “저 분들은 아니다”라는 평을 받은 분들이라 한다. 이 두 분은 아직도 정대협에 소속돼 있다 한다.

정대협에서 실망을 느낀 5명의 할머니들이 조계종 송월주 스님을 찾아가 생활고를 호소했고, 불교계 및 사회 각계에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2년 10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처음으로 <나눔의 집> 개소식을 갖게 되었고, 명륜동, 혜화동을 거쳐, 1995년 12월 조영자씨가 기증한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소재 650여 평의 대지에 300여 평의 건물이 지어져 있는 것으로 소개돼 있다.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위안부 할머니 1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라 한다.

이 곳은 관광하러 한국에 온 일본인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고, 국내외로부터 성금이 답지된다고 한다. 먼저 나눔의 집을 지어달라 호소했던 할머니들은 운영자측에 대해 많은 불만이 있어 나갔고, 현재 홈페이지에는 10명의 위안부 얼굴들이 나타나 있지만 이들 중 약 5명 정도는 중국에서 온 할머니들이라 한다. 이 중국 할머니들 중 몇 명씩이 하루에 3만원을 받고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 집회에 나간다고 할머니는 말한다.

‘‘정대협’이 기독교인들이 만든 단체라면 ‘나눔의 집’은 불교인들이 만든 복지시설이다. 원장은 혜진 스님, 무궁화회 33인은 진짜 “일본군위안부”이라 주장하며, 이분들은 정대협과 나눔의 집에 대해 상당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

무궁화회 할머니 심회장은 불신을 이렇게 표현한다.

1) 두 기관들은 위안부를 이용하여 국내외로부터 모금도 하고, 자신들의 명예를 올리기 위해 일하며, 모금한 돈을 나누어 주지도 않는다.

2) 몇 명 안 되는 할머니들을 앵벌이로 삼아 국제 망신을 시키고 다닌다. 우리는 돈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명예다. 우리를 이용하여 국제 모금을 하는 것은 우리를 두 번 모욕 주는 행위다.

이러한 취지에서 심미자 할머니는 6명의 변호인들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통해 2004년 3월, 위 두 기구(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를 상대로 “모금행위 및 시위동원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가처분신청 자료 보관중).



위안부를 위한 일본인 사회운동


1995년, 일본에서는 무라야마 전직 총리가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일본 사회에서 광범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군으로부터 피해를 본 12개국 여성들을 위한 단체인 것이다. 실제적인 주택개선, 간호 및 의료, 의약품 보조 등 본인의 실정과 의사를 반영하여 지원하겠다는 것을 문서로 약속했다. 이에 따라 한국 위안부들에게는 500만엥씩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할머니들이 이 돈을 받으려 하자 정대협과 정부에서는 할머니들에게 “당신들이 이 돈을 일본으로부터 받으면 창녀가 된다. 절대로 받지 말라”고 했고,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서는 “한국정부가 받아서 기념관과 위령탑을 건립할 것이니 정부에 달라”는 말을 했다 한다.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는 7명이 500만엥을 받았는데 정대협은 이 할머니들을 가르켜 창녀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진짜 할머니 말에 의하면 “개인이 받으면 창녀이고, 정부가 받으면 당연한 것”이라는 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며 분해 했다.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은 나머지 위안부들은 한국정부로부터 3,150만원씩을 받았다 한다. 진짜 할머니는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에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지만 아시아여성기금은 2005.3.31자로 할머니에게 한국정부가 중간에서 방해한다는 뉴앙스가 풍기는 편지를 보내왔다.



박봉순 할머니의 경우


박봉순 할머니는 33인중 한 분으로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인해 여생을 병으로 보내다가 2005.2.30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분은 17년간 내내 식사를 하지 못했다 한다. 일본인 자원봉사단체인 ‘학기리’(확실하게 일한다는 뜻)의 대표 ‘우스끼’상이 할머니를 데려다가 정밀검사를 받게 한 후, 할머니에 맞는 우유를 개발해 17년간 보내왔다 한다. 1년에 5회 정도 한국에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와 불편한 점들을 점검했고, 아프면 일본으로 모셔다가 입원도 시켰다.

한국에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있는데 회장이 양 모씨라 한다. 양회장은 공개적으로 통곡을 했고, 5일장으로 장례식을 연기했다 한다. 널리 보도됐던 장례식에는 약간의 일본인들 말고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한다. 화장터에서 유골을 찾을 때, 한국인의 그 누구도 화장비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우스끼’상이 냈다 한다. 박할머니의 유골을 운반하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그 82세의 심미자 할머니가 유골함을 앞에 메고, 추위에 버스 두 정거장 길을 걸어 대기중인 봉고차를 타고 천안에까지 갔다 한다. 천안의 ‘망향의 동산’에까지 무릎에 얹고 가는데 너무나 힘들고 추워서 그 후 심히 앓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내세우며, 애국자인 체 하고, 양심가인 체 하던 사람들 다 어디 가고 없는가! 박봉순 할머니는 일본 여성들이 17년간 부모처럼 돌보았고, 장례식 비용도 부담했고, 장례식도 치렀다.

* 일본 봉사단체와 한국 봉사단체는 어떻게 다른가? 일본 봉사단체는 17년간 박 할머니에게 일반 자식들보다 더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장례도 치렀다. 그러는 동안 한국의 그 많은 위안부 봉사단체는 무엇을 했는가?

*일본 봉사단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감동할만한 봉사를 했지만 위안부를 위한다는 그 많은 한국의 봉사단체들은 위안부를 앵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했다는 말인가?

* 박 할머니에게 1억 5천만 원이라는 눈물 젖은 돈이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500만엥(5천만원)을 받았고, 다달이 받은 60만원들이 모인 돈이다. 이 돈은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가만 두면 정부가 갖게 된다. 그 돈을 정부가 갖어야 하는지 정부의 조치가 주목된다.



심미자 할머니의 경우


심미자 할머니는 2004.11.29. 일본 대법원에서 진짜 ‘일본군위안부’로 판결 받은 분이다. 이 할머니를 위해 법정투쟁을 해준 변화사들은 한국인 변호사가 아니라 일본인 변사호사들이며 ‘우스끼’상과 ‘히라다’상이라 한다.

1940년 황해도 모 학교 5학년 때였다. 그녀는 자수를 잘 놓았다 한다. 한국지도에 무궁화꽃이 만발한 자수를 놓았더니 선생님이 교실 벽에 붙여놓았다. 이를 본 일본 선생이 일본 지도에 꽃을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심할머니는 일본 지도에 나팔꽃을 수놓아 주었다. 하루는 일본 순경이 잡아다 심문을 했다. 일본 꽃은 사꾸라 꽃인데 왜 하루살이 꽃인 나팔꽃을 놓았느냐는 것이 트집이었다. 일본 순사에게 강간을 당한 후 고진 고문을 당했다. 등과 다리, 손톱에 심한 고문을 당해 아직도 고문자국이 깊게 패여 있다.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일본 당에 갔는데, 마침 얼굴이 예쁘고 지적으로 생겨서 일본헌병대장 스즈끼의 애인이 됐다. 신임을 얻은 할머니는 유곽생활은 면하게 됐다. 스즈끼 헌병대장의 부인이라는 증명서까지 받았다. 당시 한용운과 김마리아가 찾아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다. 엄마와 할머니한테 가는 게 소원이라 했더니 그러면 독립운동에 자금이 필요하니 자금을 대라고 말했다 한다. 심 할머니는 그게 정말인 줄 알고 일본군 장교들의 빨래를 해주고, 뜨개질도 하고, 하나마끼라는 허리에 차는 돈지갑을 만들어 20원씩에 팔아 자금을 댔다고 한다.

독립군이 와서 여행증명서를 해달라고 부탁하면 스즈끼 대장에게 친척이라고 말해 '자유통과' 효력을 가진 강력한 여행증을 만들어 주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1992년 3월, 심 할머니가 현지 증언을 하러 후꾸오카에 갔을 때, 법정에 들어서려는 할머니에게 “얼마를 보상하면 되겠느냐”고 말하기에 “야 이 나쁜 자식아, 내가 돈 받으려고 증언을 다니느냐, 일본 땅 전체를 주어도 보상이 안 된다”고 소리를 친 후, 졸도를 했다 한다. 할머니를 보상이나 받으러 다니는 존재로 알고 있는 데 대해 분노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일본인들에 이런 인식을 심어준 것은 바로 한국의 언론이요 한국의 위안부을 위한다는 사회단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할머니는 분노했다.



위안부 놀음, 이제는 제발 접어야


현재 남아 있다는 125명의 위안부 할머니들, 그리고 그 125명 중의 33명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 그들은 한국의 위안부 봉사단체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금전적인 도움을 별로 받지 못했고, 생활지원도 별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 심 할머니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한국정부로부터는 얼마나 도움을 받았는가? 한국정부는 오히려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받는 도움마저 못 받게 하는 방해꾼이라는 게 심할머니의 말이다.

지난 15년의 봉사활동이 이와 같다면 '정대협'과 '나눔의 집'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매일 같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위안부 시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에 대해 심 할머니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모금과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하는 것이고, 둘째, 위안부들의 명예를 짓밟는 행위라고 말한다. 심할머니가 바라는 유일한 것은 돈이 아니라 명예회복이라 한다. 자신들은 창녀가 아니라 국가가 강하지 못해 당한 희생양들이며 그래서 평화를 사랑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하기 때문에 ‘세계평화를 위한 무궁화회 할머니’들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 희망에 반해 오히려 위안부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위안부들을 창녀라고 하니 기가 막히고 원통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과연 위안부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그 할머니 곁에는 그 할머니를 위한 자서전을 쓰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한 사람이 있다. 자료는 실로 방대했다.

일본 사회봉사 단체 그리고 이론 정부는 한국인 위안부들에 대해 한국의 정부와 사회단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매우 불신하고 있다 한다. 그 한 예가 “위안부 행사 뒤에는 북한 공작원이 있다”는 취지의 말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위안부들을 더 이상 욕보이지 않고, 한국의 명예를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위안부 문제는 활발하게 공론화되고 조사가 돼야 할 것이다. 정대협과 나눔의 집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할머니의 주장이다.

이 대로의 위안부 행사나 위안부를 위한 사회활동은 대한민국의 명예와 ‘진짜 위안부’들의 명예를 위해사라도 중지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식으로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반일운동의 일환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필자는 어떤 불순세력들이 미선이-효순이를 왜곡하여 반미감정을 일으켜, 한국국민을 세계에서 가장 의리없고 은혜를 모르는 배운망덕한 국민으로 만드는데성공했고, 이와 동시에 위안부 역시 반일감정을 유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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