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겠다는 결심을 지인들에게 통고, 금명간 탈당을 단행할 전망이다. '백척간두 진일보'란 화두를 던진 손 전지사가 끝내 한나라당과의 15년 인연을 끊고 새 길을 걷기 시작한 양상이어서, 향후 정국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올 전망이다.
손학규, 친구 교수에게 17일 "나 탈당한다"
손 전지사는 자신을 찾아 백담사로 차를 타고 오던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에게 "만날 생각이 없다"며 발 돌리게 했던 지난 17일 오후 평소 절친한 사이인 모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한나라당을 탈당한다"고 알렸다.
당일 새벽 손 전지사를 만났던 낙산사 정념 스님도 기자들에게 "길을 찾은 것 같다. 그 전에는 길이 나 있는 곳으로만 갔었는데 이제부터는 그동안 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가려는 것 같다"고 손 전지사의 탈당 결심을 우회적으로 전했다. 정념 스님은 "두발도 아닌 네발로 기어가야 하는 산길이었을 텐데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고 결단을 내린 듯한 의지가 느껴졌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손 전지사 탈당에 반대해온 캠프 관계자들도 그의 탈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나라당도 지난 주말 손 전지사의 탈당 결심 소식을 접하고 당 지도부는 물론, 이명박 전서울시장까지 직접 나서 "손 전지사와는 나는 형, 아우하는 사이"라며 탈당을 막기 위해 진력했으나 끝내 손 전지사와의 접촉에 실패하면서 그의 탈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양양 낙산사에서 산책 도중 약수물을 마시고 있는 손학규 전지사. 그는 이곳에서 탈당을 결심, 지인들에게 그 사실을 통고했다. ⓒ연합뉴스
넘지못한 '벽'들
손 전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은 그가 맺었던 한나라당과의 '15년 인연'의 절연을 의미한다. 재야 노동운동을 하던 그는 3당합당후인 지난 1992년 민자당에 몸을 담은 이래, 보수의 길을 걸어왔다.
이처럼 15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한나라당과의 인연을 끊기로 한 것은 '깊은 좌절감'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가 탈당을 결심한 외형적 원인은 경선 방식. 그러나 보다 근원적 뿌리는 깊다.
손 전지사는 경기도지사 재직시절 자신이 결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일자리 창출 등 실제적 측면에선 보다 많은 업적을 쌓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국민이 이를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데 서운함을 느끼고 있다.
그는 지사 재임때 기자와 만나 "똑같이 일을 해도 이 시장은 신문 일면에 대서특필되는 반면, 경기도지사가 하는 일은 수십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해와도 지방면 일단짜리 기사로 소개될 뿐"이라며 언론의 불공정성에 서운함을 나타냈다.
손 전지사가 느낀 또다른 장벽은 '지역주의'. 그는 경기 시흥 출신. 지역성이 없는 경기도 출신이라는 것이 영남 출신인 이명박-박근혜 후보에 비해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객관적 현실이다. 지역주의가 뚜렷한 영남 출신후보는 지지율에서 일단 '먹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다는 게 여론조사전문가 등의 일관적 지적이다. 반면에 손 전지사는 '100일 대장정' 등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지율이 소폭 반등할 뿐이다.
'믿었던 당내 소장개혁파'에 대한 서운함도 크다. 손 전지사와 17일 새벽 만난 낙산사 정념 스님은 "손 전지사가 한나라당 초선의원들만은 의욕이 있고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알았는데 줄서기에 여념이 없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며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나라당에서 들리지 않는다. 모두 양쪽에 줄을 서는 데 가 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실제로 손 전지사가 믿었던 수요모임 대다수는 현재 이명박계로 변신한 상태다.
'돈의 벽'도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손 전지사는 지난해 경기도지사직에서 물러나 곧바로 '100일 대장정'에 돌입하기 전, 경기도 정무부지사였던 김성식 등 측근들에게 '가진 돈 모두인 2억원'을 내놓고 "미안하지만 이게 내 전부이니, 이것 갖고 어렵더라도 선거사무실 차리고 선거를 치루자"는 말을 하고 대장정 길에 올랐다. 그는 '돈'이 아닌 '민심'에 승부를 걸었던 것. 그러나 그후 그가 목격한 것은 상대방 경쟁후보의 가공스런 줄세우기 등 조직확산 공세였다. 그는 이같은 조직확산 작업의 이면에는 '돈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의 한 측근은 최근 한 방송과 인터뷰에서 "이명박 캠프에서 지역별로 1천만원씩을 돌리고 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황석영 등의 탈당 권유
이처럼 넘기 힘든 벽에 좌절감을 느끼던 손 전지사에게 탈당 결심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소설가 황석영씨 등 지인들의 집요한 탈당 권유였다. 특히 1월초 귀국한 황석영씨의 탈당 권유가 거셌다.
손 전지사가 초기만 해도 한나라당내에서 보수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탈당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황씨는 "이명박, 박근혜가 존재하는 한 한나라당내에서 개혁을 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라며 "오히려 골수 보수세력의 연명만 시켜줘 한국사회의 진화를 가로막는 반역사적 역할만 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황씨는 이렇듯 그에게 한나라당 탈당을 촉구하며, 시인 김지하 등 대다수 재야인사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압박했다. 실제로 황씨는 연말대선에 지지후보를 내려하는 최열 환경재단이사장 등의 '창조한국 미래구상'과 시인 김지하, 이부영 전의원들의 '화해상생마당' 등과도 만나 사전에 의견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넘기 힘든 '벽'들과, 주위의 끈길진 탈당 권유에 마침내 손 전지사는 탈당을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얼마 전 "손학규는 당에 남아있어도 시베리아, 나가도 시베리아"라는 이명박 전시장의 모독적 발언이 그의 탈당 결심을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그는 '백척간두 진일보'란 화두를 던진 뒤, 실제로 장대 끝에서 허공으로 한걸음을 내딛는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 것이다.
손 전지사 탈당이 과연 '사즉생'의 극적 돌파구를 마련할지, 찻잔속 태풍으로 그칠지 예의주시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