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후보가 사실상 경선 포기를 했다. 19일 밤에 생중계로 진행될 예정이던 SBS TV토론에 전격 불참하며 칩거에 들어간 것은 사실상의 경선포기 선언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손 후보는 이로써 지난 3월19일 한나라당 탈당이란 도박을 단행한 지 정확히 반년만에 세칭 '시베리아 실험'을 접는 형국이 됐다. 실험의 결과는 실패다.
그는 왜 실패했나. 원인은 복합적이다. 그 자신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고, 신당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손학규의 '한계'는 무엇인가. 핵심은 그의 정체성이다. 그는 70년까지는 재야였다. 그러나 80년대 이후는 재야의 정반대편에 있었다. 한나라당에서 그는 개혁을 도모했다고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한나라당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황석영 등 옛 재야동지들의 러브콜을 받고 한나라당을 떠났다. 이명박-박근혜 양강구도에서 그가 설 땅은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나가면 시베리아"라고 경고했다. 그는 그러나 "여기도 시베리아였다"고 받아치고 나왔다.
탈당 초기에는 시베리아 같지 않았다. 범여권은 그의 탈당을 반겼다. 한나라당에 일정 부분 타격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의 탈당을 맞이한 범여권 분위기는 훈훈했다.
그러나 그의 탈당이 가한 충격은 별로였다. 한나라당은 변함없이 독주를 거듭했다. 한나라당이 잘나서가 아니었다. 범여권이 그만큼 못났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믿었던 정운찬 전서울대총장이 4월말 불출마 선언을 했다. 그가 3월 서둘러 탈당한 이유중 하나는 정 전총장의 출마선언 전에 기반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운찬과 붙으면 시너지 효과가 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정운찬이 사라졌다. 그의 파트너는 열린당 탈당파와 열린당, 그리고 민주당 등 기성 범여권만 남았다. 이때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묻어서 기성정치권, 범여권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신당 멤버가 됐다.
손학규 후보가 17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당초 참석하겠다던 정동영-이해찬 후보가 모두 불참했다. ⓒ연합뉴스
손학규의 좌절을 가져온 또하나의 한계, 즉 '신당의 한계'는 보다 지독한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 신당 대선주자들을 우습게 봤다. 자신과 그들의 지지율이 벌어져도 한창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민적 시선을 끌기에 신선함은 부족하나, 이들을 제쳐 범여권 대선주자가 되면 한나라당 대선주자와 한번 해볼만하다고 생각했다. 호남 등 범여권 표가 어디 가겠냐는 판단이었다. 신당 대선주자만 되면 지지율도 올라갈 것으로 낙관했다.
그가 신당에 들어올 때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신당내 재야지분 등으로 일정부분 지분도 챙긴 것같았고, 386정치인 등도 캠프로 몰려왔다. 하지만 정동영의 조직력과 친노의 조직력을 간과했다.
정동영과 친노, 서로 상극인 이들은 손학규를 공동의 적으로 설정한 뒤 무섭게 협공을 펼쳤다. 제일 센 놈부터 링 밖으로 떨어트리는 '배틀로얄' 전투였다. 그는 처음에는 그래봤자라고 우습게 여겼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쉼없이 쏟아지는 펀치에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컷오프에서 그 충격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때 손학규는 초비상을 걸어야 했다. 발 빠르게 합종연횡을 해야 했다. 그러나 선수를 정동영에게 빼앗겼다. 본경선 직전 김한길계 14인의 정동영 지지 선언이 결정적이었다. 여기에는 추미애를 지지하던 친노 호남대부 염동연도 포함돼 있었다. 호남표가 정동영쪽으로 급속히 쏠리기 시작했다. DJ의 동교동계가 정동영 지지로 마음을 굳혔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정동영으로의 호남표 결집 파괴력은 무서웠다. 여론조사에서 단번에 정동영이 그를 제치고 10% 전후 1위로 급부상했다. 그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손학규의 유일한 무기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이었다. 이것이 무너졌다.
캠프에서 뒤늦게 '정동영-김한길 당권거래설' 등을 제기하며 강력반발했으나 이미 차는 떠나간 뒤였다. 추석뒤 29일로 잡힌 광주-전남 경선도 하나마나였다. 이 지역에서 정동영 지지율은 50%를 넘는 것으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19일 그는 TV토론 불참을 통고한 뒤 연락을 끝고 칩거에 들어갔다. TV토론은 일종의 대국민약속이다. 따라서 TV토론 불참은 사실상의 경선포기다. 탈당 반년만에 그는 정말 삭풍이 몰아치는 시베리아에 홀로 서게 된 양상이다.
손학규의 탈당 실험은 반년만에 허무하게 끝났다. 이미 예고된 좌절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좌절은 신당의 좌절이기도 하다. 이제 신당은 완벽한 도로열린당이 됐다. 그가 떠난 뒤, DJ세력과 노무현세력이 치열히 격돌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합종연횡을 할 것이다. 2007년 범여권은 이렇게 어지러운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