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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억 먹은 김홍업이가 " 통합 라도당" 국회의원 후보???

도로 라도당???
조회: 922

2002.07.25. 1713호


[김홍업의 치부 행각] 베란다에 감춰둔 10억원의 비밀
현대·삼성·국정원 등으로부터 거액 수수7년 만에 외형 재산 두배 늘어나



지난 7월 13일 오후 서울 홍은동 벽산아파트. 구속된 대통령 차남 김홍업(金弘業)씨와 한 아파트에 살던 주민들 사이에서는 언론에 보도된 김씨의 ‘재산 관리 수법’이 줄곧 화제였다. 베란다 한 쪽 창고에 거액의 수표 더미를 숨겨놓고 가구로 막아놓았다는 내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주민 최모(여)씨는 “한 마디로 배신감을 느낀다”며 “최근 주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초동에 고급 아파트를 소유한 김씨가 우리 아파트에서 산 것은 위장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고 말했다. 한 아파트 주민은 “돈이 쌓여 있는 줄 알았으면 가서 들고 나올 걸 그랬다”는 말도 했다.


▲ 홍걸씨가 거주하고 있는 홍은동 벽산 아파트. 원안은 같은 아파트 내 베란다 안에 있는 창고
아파트 주민들에 따르면 김씨에 대한 평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DJ가 취임하기 전인 95년 아파트에 입주해온 김씨의 생활 태도가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업씨가 사는 동 앞에 경호 요원들이 상주하는 임시 철제건물이 설치되긴 했지만 대통령 아들이라고 주위에 큰 불편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장’ 목적이었는지는 몰라도 김씨가 산 벽산아파트는 ‘평범한’ 서울 시내 중산층 아파트 중 하나다. 김씨의 집인 104동 1102호(51평형)의 경우 바로 눈 앞에 인왕산이 보이는 등 전망이 좋아 그나마 단지 내에서 가장 비싼 곳에 속한다. 근처 부동산 중계업자는 “현 시세가 3억6000만원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 가격의 거의 세배에 이르는 10억원이라는 거금을 베란다에 숨겨 놓았었다. 김씨 아파트와 같은 구조의 집에 가서 확인한 결과 베란다 창고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여느 아파트에서 보듯 베란다 한쪽 끝을 문으로 막고 안에 선반을 질러놓은 공간이었다. 문 앞에 가구를 막아놓은 ‘이상한 행동’ 말고는 거액을 숨겨놓으리라 아무도 생각 못할 공간이었다.

이날 김씨의 아파트는 굳게 잠겨 있었다. 김씨의 아파트가 내려다보이는 건너 편 동에 가서 보니 집안에 인기척이 드물었다. 문제의 베란다 창고 앞에는 가구도 보이지 않았다.

◆ 부친 대통령 취임 후 재산 본격적으로 늘어

검찰의 기소로 만천하에 드러난 김씨의 ‘치부(致富) 행각’은 사실 일반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별한 직업도 없던 그는 7년 만에 외형상 재산을 두배 이상 불리는 놀라운 ‘재(財) 테크’ 솜씨를 발휘했다.

검찰에 따르면 2002년 7월 현재 홍업씨의 재산은 45억5000만원. 세부 내역을 보면 금융재산 18억원(현금 10억원+예금 8억원)과 부동산 15억5000만원(서울 서초동 아파트 14억원+역삼동 오피스텔 1억5000만원), 채권 15억원, 채무 3억원 등이다. 검찰은 “홍업씨는 95년 약 20억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96년에 5억원, 97년에 6억원의 재산이 늘었으며, 98년 이후에는 14억원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홍업씨는 이 돈의 대부분을 대기업이나 정치인 등으로부터 후원금이나 활동비 명목으로 받았으며 이를 자신의 집사 역할을 했던 김성환(金盛煥ㆍS음악방송 회장)씨와 김병호(金秉浩) 전 아태재단 행정실장을 통해 돈세탁해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업씨의 유제인(柳濟仁) 변호사 등에 따르면 홍업씨는 80년대 초반 도미(渡美)하기 전 부동산과 예금 등을 정리해 5억원 정도를 가지고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홍업씨는 미국에서 운동화 판매 등의 사업을 했으나, 큰 돈을 벌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교민들로부터 ‘후원금’ 형식의 돈을 받아 88년 귀국 때 10억원 정도를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귀국 후 홍업씨의 부인은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을 했고, 홍업씨는 90년대 중반 친구인 유진걸(柳進杰ㆍP종건 회장 동생)씨와 함께 경동시장에서 한약 도매상을 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홍업씨는 사업에서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고 주변 인사들은 전한다.

홍업씨가 목돈을 만지기 시작하는 것은 95년 ‘밝은세상’이라는 광고·기획사를 운영하면서부터다. 정치인들을 상대로 광고·홍보업무를 해주는 ‘밝은세상’은 이후 97년 대선 과정에서 국민회의 선거조직과 합쳐진다. 95년 당시 홍업씨의 재산 20억여원은 ▲한약재 도매상을 정리하고 남은 돈 ▲부인 이름의 저축 ▲밝은세상의 수입 ▲주변에서 주는 활동비 등으로 형성된 것으로 검찰 안팎에서는 파악하고 있다.

이듬해인 96년 홍업씨는 국민회의 출신 국회의원 후보자들에게 선거기획·홍보 업무를 대행해주고 3억원을 벌었으며, 같은 해 지인(知人)으로부터 ‘내년 대선 때 사용하라’면서 건네준 2억원을 받아 재산이 25억원으로 늘어났다. 97년 연말에는 지인들로부터 대선 후원금 명목으로 9억원을 받아 이중 3억원을 쓰고 6억원의 재산을 증식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홍업씨 재산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부터다. 98년 3월 홍업씨는 삼보판지 유종규 대표이사로부터 ‘활동비’ 명목으로 1억원을 받았다. 4개월 후인 98년 7월에는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10만원권 헌 수표로 10억원을 받았으며, 이후 99년 3월부터 2000년 2월까지 매월 현대그룹으로부터 5000만원을 현금으로 받았다. 홍업씨는 삼성그룹으로부터 99년 12월 5억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홍업씨가 98년 이후 최근까지 대기업 등으로부터 받은 돈이 31억원에 이르고 이중 17억원을 사용하고 14억원이 남았다고 밝혔다. 유제인 변호사는 “홍업씨가 현대와 삼성 등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은 아태재단 자금 사정이 어려운 때라 재단운영비 등에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홍업씨는 명절과 휴가철에는 전·현직 국정원장으로부터도 ‘떡값’과 ‘휴가비’를 받아왔다. 검찰은 홍업씨 관련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발행한 수표들을 발견했고, 이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홍업씨가 임동원(林東源) 전 국정원장과 신건(辛建) 현 국정원장으로부터 때마다 돈을 받아온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임 전 원장이 국정원장 재직시 홍업씨에게 준 돈이 2500만원, 신 원장이 준 돈은 10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임 전 원장과 신 원장은 “홍업씨에게 준 돈은 국정원 예산이 아닌 개인 돈”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 헌 수표 돈세탁 후 사용

홍업씨는 대기업 등으로부터 받은 돈을 보관하고 세탁하는 데도 ‘기발한 방법’을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부친인 김 대통령이 야당 시절 탄압을 받은 영향으로 은행거래를 불신(不信)해 왔던 홍업씨는 기업 등으로부터 받은 돈을 집안에 쌓아두거나 헌 수표로 바꿔 사용했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으로부터 받은 10억원을 아파트 베란다 창고에 보관해 놓았다가 김병호 실장을 통해 16개의 차명계좌에 분산 입금시킨 후 이를 다시 100만원권 수표로 인출해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홍업씨는 김성환씨와 김병호 실장을 통해 33억원을 세탁한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아태재단 관계자들이 동원됐고, 수표→현금, 현금→수표 방식으로 돈세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업씨가 돈을 세탁하는 과정에서 자주 이용했던 은행들은 홍업씨 개인사무실이 있었던 역삼동 테헤란로에 밀집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업씨와 측근들은 헌 수표를 선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98년 7월 현대그룹이 홍업씨에게 건넨 돈은 계열사인 현대백화점에서 사용한 헌 수표들인 것으로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수사팀은 홍업씨 돈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수표의 원주인들로부터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지불한 수표”라는 진술을 잇따라 확보하고, 홍업씨에게 이를 추궁해 확인했다. 성원건설이 조속한 화의(和議)결정을 청탁하며 홍업씨와 측근인 김성환, 유진걸씨 등에게 지불한 돈도 추적이 불가능한 10만원권 수표들이었다고 검찰은 밝혔다.

홍업은 이렇게 대기업 등으로부터 거둬들인 자금을 자신의 재산을 증식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업씨는 작년 3월 서초동 가든스위트 아파트를 14억원에 매입했다. 83평형의 이 집은 23층짜리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이른바 ‘펜트하우스’. 이탈리아산 천연대리석이 사용된 거실 바닥과 도금한 수도꼭지 등으로 99년 분양 당시 평당 분양가만 2000여만원에 이르러 일반 분양 아파트 중 최고를 기록했다.

지난 7월 13일 찾아가 본 이 아파트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호화 고급 아파트답게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드나드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141가구가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방문객 출입부에 신분을 기재하고 출입한 외부인은 불과 10여명이었다. 내부에 들어가려 하자 정문 경비원이 가로 막았다. 경비원은 사진 촬영을 제지하며 무인 감시 카메라가 작동 중이라고 경고했다. 근처 부동산 중계업소는 “홍업씨가 사는 곳은 직접 거래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현 매매가를 매기기 어렵지만 약 14~15억원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아파트를 홍업씨가 소유하게 된 과정도 의문스럽다. 홍업씨는 2000년 7월 전세금 7억원을 주고 이 아파트를 임대차 계약했다가 6개월 뒤인 지난해 3월 7억원을 더 주고 총 14억원에 매입했다. 하지만 전세 계약 이후 홍업씨는 이 집에 한번도 거주하지 않았다. 집에 쏟아부은 거금을 그냥 놀리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 서초동 호화 아파트 구입 과정도 의혹

특히 이 아파트의 원 소유주는 삼성그룹 한 계열사 사장으로, 홍업씨에게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가 5억원을 건넨 사실이 이번 검찰 기소 과정에서 밝혀지면서 이 아파트를 둘러싸고 홍업씨와 삼성 간에 또 다른 커넥션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일고 있다. 검찰은 이에 대해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이 발견되지 않은 정상적인 거래로 조사됐다”고 밝히고 있고, 유제인 변호사도 “홍업씨는 외국인 임대 등으로 노후생활에 보탬이 될까 하는 생각에 아파트를 구입했고 들어가 살 생각도 했지만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주위의 조언에 따라 비워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 변호사는 아파트 구입자금에 대해서는 “홍은동 아파트 판 돈 3억5000만원, 은행 대출금 3억원, 원래 갖고 있던 돈들을 모아 지불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홍업씨는 이같은 재산 증식과 함께 그동안 유흥비로도 거액의 돈을 쓴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김성환, 유진걸, 이거성(李巨聖ㆍP프로덕션 대표)씨 등 측근들과 함께 서울 강남의 최고급 술집에서 하룻밤에 폭탄주를 수십잔씩 마시는 등 흥청망청했다고 한다. 김씨는 평소 술을 즐겼고, 술 자리에서 종업원에게 용돈으로 수십만원을 쥐어주는 등 호방한 성격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씨는 동생 홍걸씨 구속이 임박해 자신에게도 검찰의 수사가 조여오는 시점에서도 강남의 한 술집에서 측근들과 술을 마시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 술자리에는 자신의 측근 등 제한된 인물만 부르는 소심함도 보였다. 검찰 수사 결과 김씨와 측근들은 술집에 관계 공무원들을 불러 이권을 청탁했으며, 기업 오너들에게 연락해 술값을 대신 내주도록 요구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홍업씨가 자주 드나들었던 술집은 5년 전 김현철씨가 자주 갔던 곳이며, 홍업씨가 각종 이권 청탁에 개입하고, 기업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돈을 받은 등 현철씨의 전철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안석배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sbahn@chosun.com)

(백강녕 주간조선 기자young100@chosun.com)




◈‘치부의 현장’ G 룸싸롱


“‘실력자’드나드는 고급 술집”…현철씨도 한때 단골


검찰 기소장에 홍업씨와 측근들이 자주 드나들며 이권 청탁 장소로 활용했던 것으로 기재된 서울 서초동의 G 룸싸롱은 권력층 주변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진 고급 술집이다.


▲ 홍업씨가 자주 드나들던 서초동 G룸살롱컷? 원안은 같은 아파트 내 베란다 안에 있는 창고
서초역에서 남부순환도로로 가다 왼쪽 한적한 골목 안에 자리잡은 이 술집은 흰색 벽면에 갈색 줄무늬로 장식된 카리브풍의 단독 3층 건물로 주변의 고급 모텔들과 외양상 구별된다. 하지만 전나무가 솟아오른 담이 쳐있고 별다른 간판도 없어 일견 일반 주택으로도 보인다. 담장 위 한 구석에 ‘한정식 G’라는 팻말이 붙어 있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건물 입구에 지하주차장으로 통하는 차로가 있어 외부인의 눈에 띄지 않고도 바로 건물에 들어갈 수 있다.

내부는 고가구로 장식돼 분위기가 고급스럽고, ‘한정식’이라는 팻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식사와 술자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술집 주인인 정모(여)씨는 지난 70년대 서울 한남동에서 G싸롱을 운영하면서 ‘실력자’들을 단골로 많이 확보했고, 80년대 서초동에 진출, D룸살롱을 운영했다. 현재의 G 룸살롱은 90년대 오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술집은 ‘끗발’ 있는 사람들이 출입한다는 세간의 소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가격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기본 술값이 1인당 40만~50만원에 달해 하룻밤 술값만 수백만원에 이르기 예사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술집을 단골로 드나든 인사 중에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賢哲)씨도 있었다는 점. 지난 93년 현철씨에 대한 검찰 조사에서는 현철씨 역시 이 술집을 이권 청탁과 금품 수수의 장소로 활용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대통령 아들의 술집’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갑자기 언론의 조명을 받긴 했지만, ‘유명세’를 탄 이후에는 오히려 장사가 안된다는 것이 이 술집 측의 하소연. 지난 7월 13일 오후 이 술집에 들렀을 때 한 종업원은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린 후 단골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말했다.

(정장열 주간조선 기자jrchung@chosun.com)


◆청와대 표정


DJ, 바이오리듬 되살아나나…
최근 간담회 때 농담도 주고 받아


지난 2월부터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현 정권을 ‘나락’에 빠트리고, 여권을 유린했던 대통령 두 아들 문제. 아버지이자 대통령인 DJ는 과연 이 문제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나. 김 대통령이 지난 7월 15일 4개월 만에 자청해서 가진 청와대 출입기자 오찬 간담회에서 이에 대한 심경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월드컵 (응원)나갈 때 발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내가 무슨 낯으로 국민들을 보나. 대통령이니 할 수 없이 손을 흔들면서도 얼굴에 철판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외가 할 말을 잃고 몇시간 동안 앉아 있은 적도 있다.… 한순간도 마음 편한 적 없다. 저는 앞으로 저희 자식들에 대해 법이 진실을 밝혀서 죄가 있으면 엄정하게 처벌하는 데 조금도 이의 없다.”

김 대통령은 또 “일생에서 지금처럼 참혹한 때 없고, 국민에게 죄송한 적 없다”고도 했다.

그 어느 정치 역정에서보다 이번 3남 홍걸(弘傑)씨에 이은 차남 홍업(弘業)씨의 구속이 자신을 더 참담하게 했으며,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아무리 어려웠어도 떳떳했으나) 지금은 떳떳함도 없다”고 했다. 두 아들 문제가 일파만파로 커져갈 때 DJ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음을 엿보게 한다.

청와대 소식통들은 이와 관련, 극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던 김 대통령을 보면서 “행여 마지막까지 국정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김 대통령이 바이오리듬을 잃지 않으면서 국정의 고삐를 끝까지 잡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노심초사했다는 것이다. 굳건하게 버텨 왔던 김 대통령도 아들 문제의 덫에 걸려, 또 두 아들이 명분 없고 파렴치한 이유로 감옥소에 들어가는 걸 보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음을 엿보게 한다.

◆한때 YS처럼 멍하니 창밖 응시

이같은 모습은 1997년 2월 아들 현철(賢哲)씨의 구속 이후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넋을 잃었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궤적과도 흐름을 같이하는 대목이어서 눈길을 모은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본관 집무실에 보고하러 들어간 장관들이나 청와대 비서실 참모들에게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는 장면을 보여줘야 했다. 집무실에 보고하러 들어간 사람에게 한참 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고 창밖만을 응시했던 적도 있었다고 당시의 한 관계자가 실토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출입기자 간담회에서는 농담을 적지 않게 주고 받으며, ‘밝은 모습’을 보여 아들문제의 심적 부담에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음을 엿보게 했다. 이날 관찰된 몇몇 징표들은 이런 것들이다. 김 대통령은 그간 아들 문제로 어려웠을 때는 청와대 행사에서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여 왔다. 그러나 이날은 식사 후 후식(後食)으로 나온 과일 칵테일이 담긴 그릇을 손으로 받쳐들고 훌훌 마셨다. 어떤 기자가 이를 따라서 그릇을 들고 마시자 김 대통령은 웃으면서 “매사에 매너가 좋은 나라의 대통령인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오·만찬 때) 지켜보니 수프를 (그릇을 들고) 훌훌 마시더라”면서 “(이런 음식은) 수저로 떠먹으면 제맛이 안난다”고 설명했다. 과거 야당 시절부터 음식 욕심이 적지 않았던 김 대통령이 이날 식사를 하는 모습을 곁에서 본 한 인사는 “예전 모습을 보는 듯했다”고 했다.

김 대통령은 또 이날 헤드 테이블에서 “경기도 나아지고 해 언론사들 사정이 많이 나아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언론사) 사장들 중 대통령에게 자장면 산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더라”는 농담도 곁들였다. 이는 평소 김 대통령이 기분좋을 때 자주쓰는 농이 섞인 화법(話法) 중 하나이다.

김 대통령은 또 “월드컵 폐막식 참석차 일본 갔을 때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한국과 터키간 월드컵 3~4위전 경기가 끝난 뒤 두 나라 선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관중들에게 답례를 한 것이 감동적이고 부러웠다’고 하더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또 ‘월드컵 이후 K리그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다른 경기는 관심을 잘 못끄는 것 같다’고 하자 옆에 앉은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에게 “축구 이외의 경기에도 관심을 보이고, 아시안게임에 대통령의 메시지를 보내 잘 챙기라”고 즉석 지시를 하기도 했다.

김 대통령의 이같은 바이오리듬의 회복이 남은 임기 7개월 동안 어떤 궤적을 그릴지 엿보는 것도 2002년 후반기부터 2003년2월 김 대통령의 퇴임 전까지 청와대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한 거울이 될 것 같다.

(김민배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baiba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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